영들의 움직임

유보나벤뚜라 175.♡.128.23
2016.03.26 11:08 2,34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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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활성야미사 복음을 읽으며 영들의 움직임에 대해 좀더 깊게 알아듣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은 선한 영의 움직임 속에 있고, 여인들이 전해 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도들은 악한 영의 움직임 속에 있고, 베드로 사도는 영의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합리적 이성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악한 영의 움직임은 육의 차원으로서, 지금 내가 감각적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있는 이 몸뚱어리와 정신을 움직일 수 없는 참된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사 죽은 이의 부활이 있다손치더라도 이 몸의 연장선 상에서 그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 쯤으로 알아듣습니다. 또한 이 악한 영은 삶과 죽음에 대한 분별 의식 내지 경계도 너무나 뚜렷합니다. 그러면서 삶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지만 죽음 내지 죽음 이후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악한 영의 움직임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다 보니 예수님의 죽음이란 사건에 맞닥뜨려 마음에 위로와 따뜻함이 없고 스산함과 슬픔과 좌절과 허무만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여인네들은 천사의 이야기를 영의 차원에서 알아듣고 있습니다. 선한 영이 움직이면서 듣다 보니 천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 안에 커다란 위로와 기쁨과 생기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영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뜨릴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 존재 내지 참된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여인네들을 이끕니다.


알이 깨어나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 과정을 거쳐 마침내 나비가 됩니다. 애벌레나 번데기가 나비의 상태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가르쳐 줘도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육의 차원에만 집착하게끔 몰고 가는 악한 영은, 이 애벌레와 번데기 같은 상태가 우리의 본질이라고 가르칩니다. 겨우 나뭇잎 위에서 꼼지락거리며 어두운 고치 속에 갇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세상의 참된 모습이고 본질이며 전부라고 알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애벌레나 번데기가 아니라 나비가 본래 모습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애벌레나 번데기는 나비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바로 애벌레와 번데기의 과정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통해 이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 자신의 본래 의 참된 모습을 구현해 낼 것입니다. 선한 영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의 생명입니다. 죽음이라는 끝이 아닌 변화 과정을 통해 더 높고 아름다운 존재 차원에로 들어간 존재, 이것이 부활입니다.


한편 현실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우린 영들의 체험을 못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적어도 베드로 사도처럼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즉 합리적 이성을 움직여 주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찾고 나아가는 자세말입니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주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만큼 영적 체험을 하게끔 이끌어 주시면서 영적 힘과 위안 속에서 좀더 수월하게 진보를 이뤄낼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애벌레와 번데기 과정을 잘 거침으로써 제대로 된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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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님의 댓글

contemporary 108.♡.52.180 2024.04.22 12:56

simple님의 댓글

simple 108.♡.52.180 2024.04.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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