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례에 담긴 영적 의미

유보나벤뚜라 175.♡.128.23
2016.03.24 11:02 2,58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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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일 전례를 지내기 위해 충주가르멜 수녀원에 와 있습니다. 이분들의 영의 상태는 아직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지만, 외적인 물질적 환경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에 걸맞게 영의 몸들은 빛나고 아름다울 것이라 여겨집니다.


요즘 전 나이가 들어 그런지 참 씻는 게 귀찮고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매일 머리를 감고 몸에 물을 끼얹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 씻을 것도 아니면서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오늘 세족례의 복음을 접하면서 새삼 씻는다는 것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에서 보여 주신 세족례는 그저 비천한 종처럼 더러운 발까지 손수 씻겨 주실 정도로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이 왜 지금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나중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봐도 그저 단순한 사랑을 가리키고 있는 것같진 않습니다. 


제가 알아들은 것은 ‘진리’였습니다. 마지막을 코앞에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각별히 온전한 진리를 알아듣고 진리 위에 걸어갈 것을 가르치시며 촉구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늘나라의 진리를 제대로 알아듣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늘 주님 곁에 머물며 그분을 뵙고 닮아 왔기 때문에 에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목욕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함에도 아직 완성을 이루진 못했기에 발이 더러워지고 때가 탈 수 있어 발만 씻어내면 온전히 에고로부터 벗어나 진리 위에 맑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서 있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모두가 진리 위에 서 있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진리를 비추고 진리를 가르치기를 세족례를 통해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이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넌 지금 발이 더럽잖냐, 발 씻어!’하는 식으로 지적하고, 높은 데서 입으로만 가르치길 원하지 않으시고 직접 쪼그리고 앉아 발을 씻겨 주시길 원하십니다. 에고와 육에 사로잡혀 더럽혀진 가운데 진리 위에 있지 않은 이에게 직접 종처럼 꿇어 앉아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길 원하신 것입니다. 


진리 중에 으뜸 진리가 사랑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그 진리를 전함에 있어서 주인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이처럼, 지시하고 가르치고 입으로 떠들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종처럼, 비천한 지위에 있는 이처럼, 직접 자기 몸으로 보여 주고 행함으로써 가르치라는 뜻에서 세족례를 행하고 계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종처럼 그렇게 실제 몸으로 행함으로써 진리를 드러내고 가르치다 보니 애쓰는 노고가 따름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론 인내롭게 마음앓이를 하며 기다려야 하고, 또 때론 몸을 더럽혀야만 하기도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영으로 깨어 있으면서 영적 진리를 전하는 이는 종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몸을 씻고 깨끗이 함은 바로 진리를 좋아하며 추구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허위에 오염되어 더럽히지 않고 거짓의 불순물로 채우지 않는 가운데, 순수하고 깨끗한 진리 위에 서서 맑고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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